살아야겠다 (김탁환 저/ 북스피어)

2019. 8. 14. 01:28논문 밖 과학읽기

2015년 어느 날, 옆의 부서의 팀장이 오피스 문들 두들겼다. “너 한국에서 메르스 터진 거 아니? 혹시 한국에 메르스 관련 아는 사람 있으면 연결 좀 시켜줄래?” 난 그렇게 한국의 메르스 사태를 알게 되었다. 밤낮으로 한국 뉴스를 검색하면서, 한국에 있는 내 가족과 실시간으로 연락하면서, 늘어나는 숫자와 줄어드는 숫자들 사이에 격분과 염려와 안도를 담았었다.

메르스가 휩쓸고 간 후, 한국 사회에 남아있는 게 무엇이었나?
[살아야겠다]는 방역의 선봉에 섰던 의료 종사자의 이야기도, 진단을 담당했던 실험실의 이야기도, 정책을 담당했던 이들의 이야기도 아니다. 사람들의 뇌리에서 숫자로 불려지던 “확진 00번 환자”, 그들의 실체적 이야기이다. 세월호를 둘러싼 이들의 이야기를 그린 [아름다운 그이는 사람이어라]라는 소설을 쓴 김탁환 소설가가 메르스 생존자와 사망자의 관점에서 메르스 사태를 이 책에 담아냈다.

2014년 전 세계를 공포에 떨게 했던 에볼라가 아프리카에서 창궐한 뒤, 사람들은 에볼라와 싸워온 사람들에 집중했다. 2014년 타임지는 올해의 인물에 “에볼라 전사들 (Ebola Fighters)”를 선정했다. 아프리카에서 에볼라에 맞서 싸운 의사, 간호사, 응급구호사들이 선정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에볼라 전사이자 에볼라 생존자이다. 그리고 그들은 다시 아프리카로 돌아갔다. 그들의 신앙적이고 인도주의적 사명감과 함께 그들에게는 “에볼라 생존자”라는 낙인(Stigma)이 남아 있었다. 그들이 미국이나 영국 땅에서 ‘에볼라 생존자’라는 낙인을 가지고 정상생활을 하면서 살아갈 수 있었을까? 아프리카의 에볼라 생존자의 상황은 더 심각하다. 에볼라 생존자들은 자신들의 터전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었고, 에볼라 치료 센터에 머물면서 에볼라 치료 및 방역을 위한 일들을 하는 편이 더 낫다고 했다. 정부와 다국적 지원단체 그리고 WHO는 앞장서서 캠페인을 벌였다. We are survivors and not a virus.” “Ebola survivors are our heroes and heroines. Stop the Stigma.”라는 문구를 앞세워 에볼라가 유행했던 국가에서 그들의 낙인을 덜어주기 위해 애썼다. 에볼라 치료가 완치된 이들에게 시에라리온 정부는 “생존자 ID”를 발급했다. 의학 자선단체인 MSF는 외적인 합병증 뿐만 아니라 심리적인 치료도 그들에게 필요하다고 이야기했으며, 과학자들은 에볼라 바이러스가 얼마나 신체의 어느 부분이나 분비물에 생존할 수 있는지에 대한 연구를 통해 생존자들의 안전을 알렸고, 에볼라 생존자들의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국가적, 경제적, 보건학적 측면에서 그들을 돕고 받아들일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아직도 노력하고 있다.

메르스 사태 이후, 한국은 어떤가?
컨트롤타워는 없었고, 정확한 가이드라인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우연히 그 응급실에 있다가, 장례식장에 갔다가, 응급구조를 하다가, 환자 치료를 하다가 수많은 이들은 고스란히 메르스에 노출되어, 총 감염자 186명에 38명의 사망자를 남겼다. 그 어느 누구도 책임을 지는 곳이 없었다. 국가는 전염병을 관리 감독해야 하는 국가로서의 역할을 다하지 못했다. 아니, 애초부터 시스템이 전무했다. 전반적인 대응 미비라는 구실로 밤낮없이 일한 실무직 공무원들은 면책되었고, 24시간 수천 건의 진단을 해내던 연구관들의 노고는 마치 없었던 일처럼 돼버렸고, 보건복지부 장관, 국민 안전처 장관, 중앙안전관리위원회 총리 대행 등의 고위 관리 등 정작 진짜 책임 있는 자들은 책임을 회피했다. 정부는 경제적인 손실은 본 병원들에게 보상을 해주었으며, 방역과 치료에 나섰던 의료진에게는 유공자 훈장을 주었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생존자와 사망자에 대한 사후 대책은 없었다. 메르스 생존자들은 에볼라 생존자들이 그랬듯이 합병증에 시달렸다. 엘리베이터를 타거나 사람 많은 곳이 버겁게 느껴지는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도 함께 왔다. 사회가 그들에게 부여한 ‘낙인’으로 인해 삶의 공간을 잃어갔다. 어제까지 이웃이었고, 친구였고, 동료였던 이들에게 그들은 바이러스로 취급되었다. 소설 속의 메르스 생존자 길동화는 30년을 넘게 다니던 물류 창고에서 쫓겨나고, 메르스 생존자인 것을 숨기고 생계를 위해 아르바이트를 했으나 그마저도 생존자임이 알려져 쫓겨났다. “나는 바이러스 덩어리가 아니야! 나는 사람이야! . 환자-생존자-사망자의 가족들도 ‘낙인’의 예외는 될 수 없었다. 메르스 마지막 환자였던 김석주의 아들은 어린이집 원장으로부터 환불해 줄 테니 다른 곳으로 가라고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0번 환자에서 0번 환자로 감염되는 역학적 방법의 줄 긋기는 그들을 피해자와 가해자로 갈라놓았다. 이 소설은 그들을 모두 ‘피해자’로 정의한다. 메르스 환자가 감염되고 또 다른 이를 감염시킬 수밖에 없었던 국가와 병원의 시스템 부재를 먼저 고민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우연히 그곳에 있다가 감염되고 감염시킨 것이지, 그들이 불결하고 부정직해서 스스로 전염을 확대시킨 것은 아니지 않은가?

한국의 메르스는 2015 11 25일 마지막 환자가 사망하면서 종식되었다. 사인은 메르스가 아닌 ‘림프종’. 림프종 환자의 메르스 격리 해제 기준의 미비로 그는 메르스 PCR 진단의 양성과 음성을 수십 번 넘나들면서, 제 때에 림프종 치료를 받지 못한 채 음압병실에서 사망했다.
그가 되뇌었던 말
“살아야겠다”.

그 한마디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남긴다. 전염병과의 사투로 이름 없이 죽어간 이들, 이름 없이 살아낸 이들, 그리고 그 이름을 또다시 숨기고 이 땅 어딘가에서 살아내고 있는 이들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스스로를 부끄럽게 만드는지….. 에볼라 생존자들을 사회로 다시 돌려보내기 위한 국가적 노력과 그들의 아픔을 함께 나누고자 하는 사회적 노력들이 왜 한국 사회에는 없는 것인가?

그들의 일부는 현재 법정 소송을 냈다. 생사를 넘나든 환자이자 생존자이자 피해자인 개인이 국가를 상대로 싸우는 싸움은 쉽지 않다. 메르스는 그렇게 아직도
“현재 진행형인 우리 사회의 고통”임을 이 소설을 통해서 깨닫는다. 그리고, 잊지 않아야 한다. 그들의 “살아야겠다”는 그 처절한 몸부림을….

"삶과 죽음을 재수나 운에 맡겨선 안 된다. 그 전염병에 안 걸렸기 때문에, 그 배를 타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아직 살아 있다는 '행운'은 얼마나 허약하고 어리석은가. 게다가 도탄에 빠진 사람을 구하지 않고 오히려 배제하려 든다면, 그것은 공동체가 아니다.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나 '마션'의 감동은 공동체가 그 한 사람을 포기하지 않는, 경제적 손실이나 성공 가능성 따위로 바꿔치기하지 않는 원칙으로부터 온다" (김탁환)

 

본 글은 브릭의 [논문 밖 과학읽기]에 기고한 글이다. 

원문링크 :https://www.ibric.org/myboard/read.php?Board=news&id=300153&BackLink=L215Ym9hcmQvbGlzdC5waHA/Qm9hcmQ9bmV3cyZQQVJBMz0z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