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자가 되는 방법 (남궁석 저/ 이김)

2019. 4. 7. 02:46서평

 

대학 1학년 생명과학 실험 시간. 1ml 짜리 파이펫 팁과 손가락 두 마디만 한 튜브를 보고는 신기했었던 경험이 있다. 실험이 끝나고 조교님한테 가져도 되냐고 간절하게 물어봤었다. 결국 1ml 짜리 팁 두어 개와 튜브 서너 개를 깨끗이 씻고 와잎으로 꽁꽁 싸서 기숙사 책상 서랍에 넣어 두었었다. 대학원 시절 “커피 내기 팁 꽂기” 시합이 내 미래의 인생에 지겹도록 있을지 상상도 못 한 채, 그게 뭐라고 그리 소중하게 서랍에 넣어 두었었는지…

 

큰아이 친구의 생일 파티에 갔다가 내가 과학자라는 소리를 듣고 다른 엄마들이 놀랐더랬다. 살면서 과학자를 처음 만나봤다며 농으로 악수를 청하는 이도 있었다. 사람들은 과학자라고 하면 하얀 가운에 고글을 쓰고 플라스크나 시험관에 든 형형색색의 용액을 심오하게 지켜보는 이들을 상상한다. (미디어가 문제다…) 아이들은 아인슈타인 헤어 스타일에 두꺼운 안경을 쓰고 악당의 역할을 하는 매드 사이언티스를 상상한다. (그러고 보니 우리 아이들이 보는 Pj Mask 만화영화도 캡틴 언더팬츠에도 악역은 과학자다. ㅠㅠ)


과학자로서의 나의 현실은 빳빳한 가운 대신 부직포 같은 폼나지 않는 실험복에 안경 위에 걸쳐 써서 샤프함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고글, 형형색색의 용액 대신 각종 인체 분비물이나. 천만 개가 넘는 바이러스가 우글우글대며 살아 있는 용액이나, 하얗고 포동포동한 빨간 눈의 쥐들과 그들의 채취와 함께 하는 삶이다. 악당 매드 사이언스트가 아닌, 연구소 문을 나서면서 아이 픽업 시간에 늦을까봐 마음 졸이고, 오늘 저녁 메뉴를 고민하며 누군가 나 대신 밥 해주길 간절히 바라는 평범한 아줌마의 인생을 살아간다.

 

과학자의 꿈을 가졌던 그 순간. 대학원에 진학했던 그 순간, 포스트닥 준비를 하던 그 순간, 학교가 아닌 정부 연구소에 남기로 한 그 순간. 내 삶의 선택의 고비 고비마다 나에게 과학자의 길을 조언해주던 누군가가 있었다면 내 인생은 어땠을까? 아마 삽질과 그로 인한 시간적 경제적 정신적 손실은 덜 했으리라.

 

이 책은 그 선택의 순간을 간접 체험하는 기회를 열어준다. 자라나는 과학 꿈나무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따뜻한 책은 아니지만, 과학자로서 살아가는 현실 앞에서 객관적이고 건조하게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를 명확하게 설명하며 은근히 ‘과학 덕후’의 세계로 안내한다. 논문을 읽는 법, 쓰는 법 등은 대학원생들에게 정말 유용한 지침이다.

 

실험의 결과를 손에 쥐었을 때 느끼는 ‘세상에 나밖에 모르는 것에 대한 희열’, 똑같은 프로토콜을 두고도 남들보다 아름다운 결과를 만들었을 때 느끼는 ‘내 손이 금손인 가벼’라는 자화자찬, 수십번 쓰고 고쳐서 다시는 보고 싶지 않던 논문이 ‘Accept’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이메일로 날라왔을 때의 ‘환희’, 남들에게는 중요하지 않은 연구에 대해 함께 고민하고 실험하고 소통할 수 있는 ‘덕후’들과의 네트워크가 ‘과학 덕질’을 멈출 수 없게 만든다.

 

이 책에 덧붙이고 싶은 것이 하나 있다면 ‘인간관계’이다. 가족보다 더 오랜 시간을 보내는 이들과의 원만한 관계. 인간인지라 실험 결과나 학업 혹은 개인의 성격으로 인한 감정의 소용돌이에서 동기, 선후배, 동료들 간의 혹은, 교수님이나 보스와의 적당한 거리와 존중이 정말 어렵지만 필수 조건이라고 본다. 연구가 어려워서 보다, 갑질, 무시, 질투, 시기 등의 종합세트를 경험하고, 학교 문을 나서고 과학계를 떠나는 사람들을 그동안 많이 보았다.

 

꿈 많던 학부 때에 비해 나의 꿈은 작아졌지만 ‘현실’이 되었고, 획기적이고 대단한 연구는 아니지만 ‘내 연구’가 있고, 천성이 노동인지라 책상보다는 ‘실험실’이 좋고, ‘우리 엄마는 과학자야’라며 나를 소개해 주는 아이들이 있다. 그리고 세상을 바꿀 수는 없지만, 세상에 언젠가는 도움이 되겠다는 ‘소박한 꿈’은 늘 간직하고 있다. 그래, 내가 과학자가 되길 잘했구나.

 

과학자의 길은 때로는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기나긴 ‘마라톤’의 길일지 모른다. [과학자가 되는 방법]을 통해 그 길을 “미리 보기” 하는 기회를 가져 보길 바란다. 그 “미리 보기”가 끝난 후에는 겁내지 말고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길 권해본다. 중간에 멈춰도 되고, 다른 길로 돌아가도 된다. 교수가 아니더라도, 박사가 아니더라도, 과학자는 될 수 있으니 말이다. 
정답이 없는 길, 그 길이 ‘과학자의 길’이 아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