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협주곡 2-3] 언니들이 사라졌다

2019. 4. 7. 02:59과학협주곡

[2016년 여성과학기술인력 현황]1에 따르면 2000년대 초반부터 2016년까지, 한국의 자연·공학계열 여학생의 입학·졸업률은 평균 30% 초반 때로 큰 변동 없이 이어지고 있다. 그에 반해, 2016년 대학, 공공연구기관, 민간기업 연구기관의 중간 관리자급 이상의 여성 보직자와 연구과제책임자는 조금씩 증가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으나 여전히 10%를 밑돌고 있다. 또한, 비취업 여성 중 경력단절 여성은 59.5%에 이르며, 이들 중 30-40세의 연령이 가장 높은 경력단절률을 보이고 있다. 복잡하게 숫자를 늘어놨지만, 요약하자면 여성과학기술 인력에 대한 인풋(Input)과 아웃풋(output)의 숫자가 일치하지 않으며, 30-40대에의 여성과학기술자의 경제활동률이 제일 낮다는 것이다. 우리가 사회학 연구 및 정부 정책을 통해서 숱하게 들었던 여성의 경력단절, 사회구조와 정책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여성과학자의 입장에서 30-40대 낮은 경제활동률에 대해 되짚어 보고자 한다. 

언니들이 사라졌다. 

지금의 자연계 대학의 여학생 비율과 비슷하게, 내가 대학에 다닐 때도 학과의 특성상 약 60%가 여학생이었다. 학업 상위권도 여학생이 많았고, 자연스럽게 대학원 진학 비율도 높았다. 과학자가 되겠다는 꿈을 가지고 언니들은 내 눈앞에서 혹은 옆에서, 아직 여성과학도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은 학교와 사회에 함께 뛰어들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언니들이 사라졌다. 대학원을 마치고, 취업을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남편을 따라 지방이나 해외로 옮기는 각 상황과 환경에 따라 언니들은 흔적 없이 사라져 갔다. 그렇게, 멘토이자 동료였던 언니들이 사라짐으로써 기울어진 운동장을 외롭게 뛰어온 세대가 지금의 30-40대 여성과학자이다.

 

언니들의 부재는 오늘을 살아가는 여성과학자, 여성과학도들에게 두 가지 문제점을 안겨준다. 

첫 째는 현재 여성과학계는 현실적인 롤모델을 제시하지 못한다. 40대 후반-50대의 극히 소수의 가정적, 경제적, 학문적 안정을 이룬 멘토들에게는 10-20대와의 세대 차이와 현실적 환경변화에 따른 현실적이고 솔직한 멘토로서의 역할을 기대하기 어렵다. 베스트셀러 [랩걸]을 쓴 호프 자런 (Hope Jahren)은 여성이자 비인기 분야의 연구자임에도 불구하고, 세 번의 풀브라이트 상을 수상하고, 오슬로의 환상적인 오로라 아래서 자신의 식물을 가꾸며, 세계 여성들과 여성과학자들의 롤모델로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실력이 출중해 어디든지 오라는 학교가 있어 자유롭게 그녀를 따라서 근무지를 옮길 수 있는 남편과 그녀가 없어도 그녀의 실험실을 관리하며, 지속적인 연구를 지원해주는 믿을만한 동료가 있다. 호프 자런과 같은 완벽한 남편과 동료는 누구에게나 주어지지 않는다. 성공한 멘토는 ‘성공’에 대한 모습만 부각하고 현실적으로 여성과학자들 앞에 닥친 문제에 대해 스스로 공론화하길 꺼리며, 현실에 불만을 품지 말고 열심히 노력하면 꿈은 이루어진다고 이야기한다. 학업, 진로, 꿈에 대한 남성 멘토도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라, 남편의 커리어와 자신의 커리어를 저울질하는 시간이 올 수 있다는 것을, 수년에 걸친 물질적, 시간적 노력들이 가정이라는 사회적 테두리에서 희생될 수 있다는 있다는 것을 나누고 해결책을 함께 고민하고 조언해 줄 수 있는 멘토는 보이질 않는다.

두 번째는 남성이 다수를 차지하는 과학 생태계에서 교육받은 여성과학자들은, 어떻게 또 다른 여성과학자를 키워내야 하는지에 대한 경험이 부족하다. 한국 노동경제 학회지에 발표된 논문2에 따르면, 높은 경력의 여성일수록 차별을 이겨내고 능력을 인정받은 경우가 많기 때문에 다른 여성에 대한 인정 기준이 높은 ‘여왕벌 현상(Queen bee syndrome)’과 여성 근로자의 경력이 높아질수록 남성다움, 터프함, 경쟁적인 태도와 같은 정통적인 리더십 특성이 요구되는 ‘역할 일치 이론’에 부합되는 현상이 나타나며, 여성 근로자가 여성 상사에게서 더 많은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결론을 발표했다. 과학계에도 이와 비슷한 현상이 분명 존재한다. 덧붙이자면, 여성과학자들 조차도 결혼, 출산, 자녀교육에 따른 자기자신과 학생 혹은 연구자의 생활의 변화에 적절하게 대처하지 못하고 있으며, 연구결과를 내고 논문을 발표하고 경쟁해야 하는 상황에서, 오히려 여성보다 남성을 더 선호하는 경향도 있다.

언니들의 네크워크가 필요하다. 

여성의 경제, 사회 활동 비율이 늘어나면서, 정부는 정책을 만들고, 학교와 기업은 자리를 만들고, 사회단체와 여성단체는 투쟁과 공론화를 통해 수년간 사회를 형평성(equity)있게 바꾸고자 노력해 왔다. 눈에 확 띄지는 않지만 그들의 노력으로 매년 1-2%의 여성과학자들이 더 설 자리가 만들어졌다. 그 혜택을 누리고 있는 현재의 30-40대 여성과학자들은 이제 현실적인 멘토인 ‘언니’로서, 세상 밖으로 나와 여성과학계에서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 완벽한 가정과 완벽한 환경 속에서 성공한 것처럼 보이는 이상적인 롤모델이 아닌, 깨지고 부딪히고 노력하고 고민하는 평범한 현실의 삶을 살아가는 언니의 역할이 필요하다. 앞으로 성장할 후배들을 위해, 여성으로서 여성다운 리더십과 협업을 통한 균등한 여성과학자들의 생태계를 구성하고 교육할 수 있는 “언니들의 네트워크”가 필요하다.

지난 5월에 내가 속한 재미 여성과학기술자 협회에서는 정기 컨퍼런스를 개최했다. 백신, Design Thinking, 증강현실, 자율주행차, Environmental health tracking system 구축, 그리고 lung cancer와 같은 다양한 분야를30여명 모인 한 여성단체의 컨퍼런스에서 발표했다는데 의미가 있다. 생명과학, 의학, 경제, 보건학, 역학, 경영, 교육, 영상, 도시계획, 환경, 수학, 컴퓨터공학, 디자인 등 다양한 분야의 학교, 기업, 정부기관에서 일하는 기혼, 비혼 여성과학기술자들이 함께 모였다는 것은 더 큰 의미를 갖는다. 세미나도 중요하지만, 이들 사이의 그물망처럼 엮인 수년에 걸쳐 만든 네트워크가 더 중요하다. 누군가는 그 그물을 딛고 진로를 결정했고, 새로운 직장을 구했고, 사회생활에서의 문제점을 해결했고, 가정에서의 어려움도 나누었다. 쉽지 않다. 교육과 연구를 하는 과학기술자로서의 역할과, 퇴근하고 제2의 직장인 가정에서의 역할에 더불어 사회적으로 여성에게 주어지는 수많은 타이틀로도 버거운 세대이다. 그러나, 지금 그들의 목소리와 행동이 밖으로 표출되지 않는다면 동아시아 지역 평균에도 못 미치는 18.5%3의 우리나라의 여성과학기술자의 비율은 앞으로도 비약적으로 성장하기 힘들 것이다. 

인풋과 아웃풋이 맞지 않는 이 ‘부자연스러움’을 ‘자연스러움’으로 바꾸기 위한 노력이 “평범한 과학계 언니들”의 네트워크와 노력을 통해 더 빛을 발할 수 있길 기대한다.


※ 주석
1. 2016년도 여성과학기술인력 현황, 한국여성과학기술인지원센터 (ISSN 2005-7032)
2 여자의 적은 여자인가?: 상사 성별이 여성 근로자의 노동시장 성과에 미치는 영향분석  http://www.klea.or.kr/paper/files/3_%EC%A0%95%ED%95%9C%EB%82%98.pdf
3 유네스코 통계국 http://uis.unesco.org/sites/default/files/documents/fs43-women-in-science-2017-en.pdf

본 글은 [브릭]의 "과학협주곡" 에 2018년 6월 25일 연재한 글입니다.

원문링크: http://www.ibric.org/myboard/read.php?Board=news&id=295303&ksr=1&FindText=%B9%AE%BC%BA%BD%C7